오늘 밤,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

2022. 3. 5. 08:00서평

너랑 사귀어도 되지만 조건이 세 개 있어

이들의 연애는 다른 사람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다. 앞자리 친구를 괴롭히는 남학생을 보고 참지 못한 도루는 그만하라고 말한다. 하지만 남학생은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제안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었고, 그 제안은 1반 히노 마오리한테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. 도루는 학교가 끝난 뒤 복도에서 그 애를 불러냈고,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애에게 고백을 하였다.
그러나 히노는 의외의 대답을 하고 만다.
"너랑 사귀어도 되지만 조건이 세 개 있어
첫째, 학교가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.
둘째, 연락은 되도록 짧게 할 것.
셋째,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. 지킬 수 있어?"
도루는 답한다.
"그래"
이렇게 둘의 연애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게 된다.

널 좋아해도 될까

히노와 사귄 지 일주일이 지나고 도루에게는 마음 깊숙이 찌릿한 마음이 생겨났다. 이게 단순히 히노의 외모가 끌려서 시작된 것일까. 아니면 늘 웃는 얼굴 뒤에 무언가를 숨기는 히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생겨난 마음일까.
도루는 눈을 감았다. 그러면 감각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다. 태양의 온기, 잔디 냄새, 옆 사람의 호흡까지 느껴질 듯했다. 그 순간 연애를 거짓으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. 그리고 내뱉은 말. "널 좋아해도 될까" 좋아하는구나. 말을 하고 나서 도루는 실감했다.
하지만 히노의 대답은 단호 했다.
"안돼"
도루는 물었다.
"왜?"
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히노는 친구 한 명, 가족, 선생님밖에 몰랐던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기 시작했다.
"병이 있어.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건데 밤에 자고 나면 잊어버리거든.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."

익숙해진 선화의 궤적에 어제의 우리가 있다.

도루는 히노가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히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, 히노의 미소를 좋아하고, 감정이 아닌 기록으로만 남을 추억일 뿐이지만 잠깐의 순간까지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.
나는 그런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이 구절을 히노의 반복되는 공백을 도루가 채워준다는 느낌으로 해석하였다.

오늘의 나는 오늘 하루만의 나다. 오늘이라는 이날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.

나는 이때부터 이 소설을 보면 눈물이 고인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. 이는 히노의 마음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문장이다.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니 영화 '뷰티 인사이드'에서 매일 아침 모습이 바뀌는 진우가 생각났다. 고등학생 때 나는 그 영화를 보 나서 두 주인공의 관점으로 어제와 오늘의 내 모습이 다른 건 어떤 기분일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나에게 낯선 모습으로 다가와도 나는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.
이 책은 그 영화와 분명 다른 내용이지만 사랑의 가능 범위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다. 나를 기억 못 한다고 해도, 오늘의 내가 어떤 사람으로 그의 일기장에 기록되고, 그 기록만으로 나를 마주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그에게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줄 수 있을까.

기억이 그런 것처럼 지금 이 감정도 사라져 버릴까. 뿌리내리는 일은 없을까. 어디까지나 정보로 처리되어 감정의 움직임이 축적되는 일은 없을까. 제발 남는 게 있기를. 지금의 이 감정이 내일의 나에게로 이어질 수 있기를. 잊지 않기를

히노의 아침은 벽에 붙어있는 포스트잇과 책상 위에 있는 일기를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. 어제는 사랑했지만 오늘은 정보만 가지고 또 그를 알아가야 한다. 바뀌고 싶지만 바뀔 수 없는 낯선 환경을 적응해야 하는, 그런 상황을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히노의 간절함을 담은 문장이다.
나에게는 평범한 일상들이, 잊고 싶은 날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날들이 되었다.

내 현재는 그 애가 만들어준 미래 덕에 있다.

도루는 히노가 바뀔 수 있도록 고민하였고,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히노에게 절차 기억을 통해 몸이 기억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. 도루였기에 가능했던 히노의 성장이다. 성장을 주는 사랑은 좋은 사랑이다. 어제보다 오늘 더 그를 사랑하는 건 마음의 성장이고, 불확실한 미래지만 그에게 영향을 받아서 시작했던 모든 일은 나 자신의 성장이다.

마지막으로

오글거리는 구절이 많지만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.
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간 만큼 나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책이다. 결코 사랑이 가볍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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